농민운동사를 논함에 있어 우선 농민운동이란 무엇이냐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농민운동에 대한 개념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농민운동의 내용이 달라지고 우리나라에서의 농민운동사를 어느 시기로부터 나누느냐 하는 문제와 더불어 어떤 내용의 것을 운동의 대상으로 다루느냐 하
소작농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으며, 특히 함경북도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자작농의 비율이 50%를 넘는 지역이다. 아직 이 지역에서는 지주제가 심각하게 확대되어 있지 않았다.
함경남북도 지역은 지주제의 미발달, 자작농층의 광범한 분포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
농민이 동원되었지만 개간 후 아무런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수리조합비 역시 과장하게 부과되어 자작농이 토지를 팔고 소작농민으로 전락하였을 뿐 아니라 중소지주조차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일본인 지주 등 상당 재산을 갖춘 대지주만이 이 사업을 통해 토지소유를 확대할 수 있었다. 산
농민운동
1. 소작인조합에서 농민조합으로 발전(26년 이후)
소작농 중심조직에서 자작빈농, 자작중농까지 포함했다. 지역적으로도 남부지방 뿐만 아니라 북부지방, 동해안지방에서도 활발히 조직되었다.
2. 조선농민총동맹 창립(27.9)
산하 농민단체 수 27년 160개소, 28년 307개소이다. 그러나 각
갑오농민전쟁의 결합」,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2~3쪽
또한, 갑오농민전쟁의 역사적 역할과 성격을 명확히 하기위한 농민전쟁의 주체세력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다. 그간에 학계에서의 경영형부농설과 잔반층설이 존재하였으나 1978년에 제기된 양인 ․ 천민 출신의 소작농
소작농의 처지로 떨어졌다. 농민들은 궁핍에 시달렸고, 만주나 간도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일제의 수탈에 맞서 농민들은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소작쟁의를 벌였다. 그리고 학생과 지식인들은 1920년대 천도교 중심의 조선농민사의 활동을 시작으로 YMCA나 YWCA의 계몽운동, 1929
소작농의 처지로 떨어졌다. 농민들은 궁핍에 시달렸고, 만주나 간도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일제의 수탈에 맞서 농민들은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소작쟁의를 벌였다. 그리고 학생과 지식인들은 1920년대 천도교 중심의 조선농민사의 활동을 시작으로 YMCA나 YWCA의 계몽운동, 1929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자주교육운동
해방공간의 제주의 상황은 대체로 다른 지역의 상황과 비슷하나, 인구이동이 현저히 많았고 자영농이 상당히 증가해 토지문제보다는 농민운동 · 곡물수집문제 등 민중 생존문제 등이 더 시급했다는 게 특징이다. 그 대략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농민에게 행사했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농민을 조속히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3. 정당의 지지기반 확충
그 당시 정치권의 농지개혁에 대한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 될 수 있다. 한쪽은 그간 농민들의 토지개혁운동을 주도해온 민주주의 민족 전선, 즉 좌익세력인 조선 노동당이